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일레 셀라시에 (문단 편집) === 한국과의 인연 === > "[[6.25 전쟁|가거라!]]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, 전부 [[대한민국|거기]]에 가서 모두 맹렬하게 싸워서 전사하거라![* 당연히 원정군의 결의와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발언이다. 그 정도로 에티오피아가 이 전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말이다.] 만약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온다면, 짐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! 너희들의 죽음의 대가로 저들에게 [[자유]]라는 것을 저들의 손에 꼭 안겨주거라! 우리 민족이 과거에 [[이탈리아]]인들에게 [[제2차 이탈리아-에티오피아 전쟁|무엇을 당해왔는지는]] 말하지 않아도 [[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|그 고통]]은 뼛속까지 알고 있을 것이다. 그렇다! 짐도, 너희 모두도 잘 알고 있다. [[동병상련|그걸 알면서 모른 척한다면, 침략자들보다 못한 더러운 위선자일 뿐이다.]]"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의 파병 요청을 받자 당시 미국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가 반공주의, 이해득실을 따져 한국전쟁에 참가했을 때 유일하게 ''''오직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 하나로'''' 황실 근위대인 머할 서파리(መሃል ሠፋሪ / Mähal Śäfari, Mehal Sefari)를 중심으로 보병 1개 대대를 편성하고 '''강뉴 부대(ቃኘው ሻለቃ / Qaññäw Šaläqa, Kagnew Battalion)'''란 이름을 하사했다.[* [[암하라어]]로 '''강뉴(ቃኘው)'''는 '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' 또는 '초전박살(初戰撲殺)'이란 뜻이다. 한국어권에서는 [[https://www.korea.kr/news/pressReleaseView.do?newsId=156393601|강뉴]] 또는 [[https://www.korea.kr/news/policyNewsView.do?newsId=148714107|칵뉴]]가 공식적으로 사용되나 [[암하라어]] 발음은 [kʼaɲːəw\](칸녀우)에 가깝다.] 미군 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그해 9월 강원도 화천 적근산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이듬해 10월 '''철의 삼각지''' [[저격능선 전투|삼각고지 전투]]에서 진내사격을 불사하면서 위치를 고수해 미 9군단장과 미 7사단장으로부터 감사 서한을 받았다. 강뉴 부대는 본인들이 참전한 253회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아 전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. 1953년 7월 종전 때까지 연인원 3,518명[* 1956년까지 주둔 기간을 포함하면 6,037명]이 참전해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으나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. 전우의 시신도 모두 수습해 돌아가 부산 유엔군 묘역에는 에티오피아군 병사의 무덤이 하나도 없다. 휴전 후에도 강뉴 부대는 1956년까지 대한민국에 주둔하여 UN 연합군으로써 [[비무장지대]] 순찰 작전 등 평화를 지키고 전후 복구를 도왔다. 부대원들은 월급을 모아 1953년 경기도 동두천에 '보화원'이란 이름의 [[보육원]]을 세운 뒤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. 1963년에 에티오피아가 한국과 공식 수교하였고[* 유엔군 참전국들은 전후 한국 입장에서 최우선 수교 대상국들이었다.] 19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방한하기도 했는데 이때 [[박정희]]와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[[기념우표]]까지 나왔다. [youtube(_R4YWYQnhao)] [[춘천시]] [[근화동(춘천)|근화동]]에는 에티오피아 6.25 전쟁 참전 기념관과 기념비가 조성돼 있으며 당시 황제가 심었던 [[상록수]]도 잘 자라고 있다. 덕분에 [[춘천]]과 [[아디스아바바]]가 [[자매 결연]]할 때 이걸 계기로 삼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